서로 갖지 못한 것을 탐하다. 은교
"난잡한 외설은 없다."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첫 장면부터 도발의 연속이다.
외로운 소녀 은교는 창문을 닦으며 바깥과 단절된 이적요를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준다.
"할아버지 연필이 다 뭉툭해요. 연필 좀 깎아주세요.
뾰족한 건 슬픈 거다.
에이, 연필이 뭐가 슬퍼요?
글쎄, 뭐가 슬플까? 한 사물을 바라볼 때는 그 시선이 이승과 저승만큼 멀다."
"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.
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.
'할아버지, 제 연필 좀 깎아주세요'라고 네가 말하면
나에겐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다.
'할아버지, 제 눈물 좀 닦아주세요.'
단언컨대, 너와 나 사이에서 이보다 큰 슬픔은 없다."
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
서재에서 이적요가 자신의 젊었을 때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는 장면이다.
"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,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."
공대생 서지우는 알 수 없는 '이승과 저승 만큼 먼' 거울을 바라보는 시선.
소설 '은교'는 어쩌면 헤나 때문에 탄생 했을지도 모르겠다.
70대 노인과 10대 여고생의 사랑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?
요즘 즐겨듣는 넬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.
"너를 가질 수 없는 것 보다 나를 줄 수 없음이 아프다." / 넬 - Slip Away
"내가 이렇게 예쁜 아이인지 몰랐어요."
은교는 서지우가 썼다고 생각한 소설 '은교'를 통해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세상과 대면한다.
영화를 보고 난 뒤 유독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,
이적요가 잠든사이 서지우 홀로 있는 서재로 은교가 내려가는 장면이었다.
기자 간담회에서 은교의 주인공 '김고은'양도 이 장면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하니
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.
이 장면에서 은교의 대사도 참 거슬렸다.
"여고생이 왜 남자와 자는지 아세요? 외로워서..."
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하다.
보잘 것 없는 소녀를 소설 '은교'를 통해 예쁜 아이라는 걸 알게 해 줬으니 말이다.
이 영화를 로리타 줄거리와 과감한 노출을 버무린 더러운 스캔들로 봐야 할까?
남 · 여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예술로 봐야 할까?
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은교가 이적요의 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.
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는 올드보이가 되겠지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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